영어로 성경 번역, 말씀 대중화 위해 종교개혁의 독일로
"쾅 쾅 쾅!"
방문 밖에는 쾰른의 비밀경찰이 와 있었다. 완성되어 인쇄를 앞두고 있던 신약성경 영어번역 원고를 급히 챙겼지만, 워낙 다급해 많은 부분들은 챙길 수가 없었다. 비밀경찰들이 문을 깨고 들어오기 전에 그는 창문을 통해 간발의 차로 도주할 수 있었다. 비밀경찰들은 대신 남겨진 영어번역 원고와 인쇄기를 압수했다. 비밀경찰들이 애를 쓰고 잡으려 했던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영국 출신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었다. 월리엄 틴데일의 영어 성경 번역이 없었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킹 제임스 바이블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신약성경을 몰래 영어로 번역하고 출판하려 한 것일까? 그것도 영국이 아니라, 독일의 쾰른에서.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성경을 라틴어 이외에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독일에서는 루터가 종교개혁과 더불어 독일어 성서 번역을 했지만, 독일어 성서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지역에서만 통용되었다. 영국 교회는 영어 성경 번역이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었고, 이제까지 사용해 왔던 라틴어 경전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월리엄 틴데일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교회나 성직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경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존의 라틴어 성경은 소수의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영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16세기 중반 존 후퍼의 보고에 따르면, 글로스터 교구에 살던 사제 311명 가운데 168명이 십계명을 암송할 줄 몰랐고, 31명은 십계명이, 40명은 주기도문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일반 목회자들도 이런 정도의 수준인데, 일반 대중들의 성경 지식은 어떻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 말씀은 소수의 교회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서 해석되고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곡해하거나 심지어는 성경에 없는 말을 멋대로 지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 말씀이 왜곡되고 가려졌다. 틴데일은 성직자뿐만 아니라, 대중도 직접 성서를 읽어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필요했다. 그가 이렇게 영어 성서 번역을 결심하게 된 바탕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어 성서 번역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영어로 번역된 성경은 위클리프 역이 있었지만 부정확했고, 완성도도 떨어졌다. 그러나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죄로 위클리프는 죽어서도 수모를 당했다. 그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1428년 영국교회는 성경을 번역한 위클리프의 시신을 무덤에서 끄집어내 태웠다. 뼈는 갈아서 강물에 뿌렸다. 영국식 부관참시였다. 267개 죄목 중 그의 가장 커다란 죄목은 성경 번역이었다. 이처럼 영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일은 교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화형에 처하거나 죽어서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중대 범죄였다.
그러나 틴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성경 번역이 자신이 부여 받은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보호해 주었던 프리드리히 선제후와 같은 보호자도 없었다. 당시 영국을 다스리던 헨리 8세는 나중에 가톨릭과 단교를 했지만, 그때까지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 교회를 옹호했다.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가 다스리는 영국에서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 발각되면 화형을 당하거나 날선 도끼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틴데일은 성경 번역에 대한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런던 주교 턴스텔을 찾아가 성경 번역의 도움을 요청했다. 주교는 유명한 고전문헌학자였고, 에라스무스와 함께 그리스 신약성경 편집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교는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주교의 거부가 그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성경 번역은 어느 누구에게 위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한다는 확신만을 얻었다. 성경 번역을 하는 길이 순교의 길이라면, 그 길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틴데일이 이렇게까지 영어 성경 번역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틴데일은 1490년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1510년에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515년에 인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고전 언어인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1517년부터 그는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를 가르쳤던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가 공부했을 때 에라스무스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캠브리지 교수로 있던 토마스 빌니(Thomas Bilney, 1495∼1531)를 통해 그는 성경의 참뜻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에 대해 깨달았다.
토마스 빌니는 에라스무스가 펴낸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연구하다 종교개혁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을 강해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성서의 복음으로 이끌었다. 성경을 가르치고 종교개혁적 복음을 전파하던 그는 종교개혁 사상을 포기하겠다고 해서 한때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지만 끝내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월리엄 틴데일은 캠브리지 대학을 떠난 후, 리틀 소드버리에 있는 월시 경 가문의 가정교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 집을 방문하는 많은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대해 언급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중 논란이 되는 많은 점들과 의문점에 대해 토로하였다.
성직자들이 논란점을 변호하면, 그는 성경을 통해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 성경에 근거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교황을 비판하는 그에게 한 성직자가 화가 나서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낫지"라고 대꾸했다. 이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틴데일은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무시합니다. 차라리 쟁기를 끄는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합니다."
틴데일은 성직자조차 성경에 대한 무지에 가득 차서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영어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그를 이단시하고 위협하는 그곳을 떠나 런던으로 갔다. 런던으로 향하면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희망이 가득했다. 그가 그런 희망을 안고 처음 찾은 사람이 앞서 말한 런던 주교 턴스텔이었다. 턴스텔에게 거부당하자 그는 영국 어디에서도 성경을 안전하게 번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도 방문하고, 안전한 곳에서 영어 성경 번역을 하고 싶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발원지인 독일로 향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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