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영적불안 걷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 노래
루터의 삶의 궤적을 따라 아이제나흐(Eisenach)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하의 고향이기도 한 이 곳은 루터가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도움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한 곳이다. 또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의 찬송가 가사를 쓴 곳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 루터가 이곳에 온 것은 1521년 5월로 베텐베르그 95개조 선언 발표(1517년) 이후지만 이 성은 시기와 관계없이 루터의 일생에 중요한 전환과 상징을 제공한다.
루터가 일생동안 품고 있었던 신학적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신학자 커(Hugh T. Kerr)는 '의로운 하나님'과 '은혜로운 하나님'의 갈등이었다고 한다. 의로운 하나님은 누구일까.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인간적 하나님이다. 믿음과 삶의 표준이 하나님의 완전에 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언제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하나님이다. 그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고 그 괴리가 불안을 가져온다.
폴 틸리히는 중세의 영적 핵심은 불안이었고, 이 불안이 곧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중세의 사람들은 이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려고 했는가. 사람들은 자신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리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성지를 무릎으로 순례하기도 하고(예루살렘, 스페인 콤포스텔라, 영국의 켄터베리 등), 거룩한 성물을 수집하고 숭배하기도 하고(프리드리히 선제후도 5000점의 성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빈번하고 화려한 예배의식과 기도생활(예배가 없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과도한 봉헌(기부)과 속죄권의 구입, 금욕적인 자기 고행, 우람한 교회 건축, 예술 작품의 봉헌 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했다. 이 불안이 루터에게 있었고 또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가 수도원에서 고민한 문제가 이것이었다. 죄로 고뇌하는 루터를 보고 수도원장 슈타우피츠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화를 내지 않는데 그대는 어째서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가?" 그러나 슈타우피츠의 조언이 그리고 필사적인 참회와 고행이 루터를 평안하게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514년(혹은 1513년) 가을, 수도원 탑 안에 있는 서재에서 소위 '탑속의 체험'을 경험한다. 그때 루터는 시편 22편을 읽고 있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루터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그린 것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부르짖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도 없고 불경건하지도 않은 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나 대신,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내 죄를 담당하셨다."
그 순간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었다.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은 구원자의 모습,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발견은 그 후 로마서 연구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 롬 1:17에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천국의 문이 열리고 그 속으로 힘차게 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무거운 짐같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달콤한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로 루터는 한번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았다. 1521년 1월, 교황이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출교처분을 내리자 독일 정부와 교회가 보름스로 루터를 소환했다. 독일 정부는 루터에게 신변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요한 후스를 상기시키면서 강력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루터는 말했다.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
보름스에서 의회가 그의 주장과 사상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증거와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옳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다른 방도를 취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가 보름스를 떠날 때 독일 정부는 군사들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지만 로마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기 위하여 교활한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 챈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기사들을 보내 루터를 납치하는 형식으로 바르트부르그라는 성에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에서 융거 에코라는 이름으로 10개월을 보내면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12주만에 독일어로 번역했다.
나는 바르트부르그 성을 직접 걸어 루터가 남긴 발자취를 더듬었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던 '루터의 방'이 아담하게 보존돼 있었다. 이 방은 사실 교황이나 왕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가둔 죄수의 감옥이었다. 죄수의 감옥을 루터는 자유의 방으로 바꾸었다.
산 아래 아이제나흐 도시가 펼쳐졌다. 루터는 바로 이곳에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의 가사를 썼다. 그렇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모든 두려움의 근저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종교적 본심일 수 있으나 성경적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도 무서운 분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값어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값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폴 틸리히).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의 효험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그 분이 신뢰할 만한 분인가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비록 내 믿음이 연약해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과 똑같은 보배, 똑같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두 사람이 각자 백 굴덴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그것을 종이 주머니에 담아 놓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쇠로 만든 금고에 보관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똑같은 보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당신과 나의 신앙이 강한가 약한가에 상관없이 똑같이 은혜로운 분이시다"(루터).
무엇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가? 우리의 믿음,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렇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신다.
http://cafe.daum.net/charisland
<한신교회 목사>
'카리스랜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취 (0) | 2012.06.27 |
---|---|
신천지, 부평 종교시설 건축위해 관공서 압박 (0) | 2012.06.26 |
믿음으로 살아라 (0) | 2012.06.23 |
대광고 사태 26개월… 대광학원 이사장 이철신 목사 드디어 입을 열다 (0) | 2012.06.21 |
가출, 이혼, 알콜중독의 막장인생에서 하나님 은혜로 일본선교사가 된 이명희 목사 (0) | 2012.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