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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줄 인생 바꾼 나침반은 래디컬 크리스천”… 아이티서 구제 사역 박동한 선교사의 꿈

포항부동산정보공인중개사사무소 2011. 12. 26. 23:37

아이티에서 사역 중인 박동한(55) 선교사는 '민족 복음화의 환상'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 그에겐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립한 고 김준곤 목사와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려대 CCC 대표와 서울지구 CCC 학생대표 등을 역임한 그에게 고 김 목사가 주창한 "민족의 가슴 속에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어 이 땅에 푸르디푸른 그리스도 예수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민족 복음화의 선언'은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학생 시절 박 선교사는 평생 그 선언을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고 결심했다. '전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야말로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됐다.

대학 졸업 후 박 선교사는 이랜드에 입사했다. 재무본부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거기서 그는 박성수 회장으로부터 '믿음의 기업'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자신이 거하는 일터가 소명과 헌신의 자리임을 깨달았다. 이랜드에서 그는 비지니스(Business)와 선교사(미셔너리·Missionary)의 합성어인 '비지너리'로 살 것을 다짐했다.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서강대 경영전문대학원(MBA)에서도 공부했다. 이후 박 선교사는 벤처기업 대표 등을 거쳐 국제사랑의봉사단 사무총장과 단장을 역임했으며 이롬글로벌 대표이사 등도 지냈다. 국내의 대표적인 비지너리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2006년 7월에 그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남미 도미니카로 갔다.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보다 '래디컬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직접 현장 선교사로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다가가기 원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현장에 나가고 싶었다. 50세에 인생의 대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평생 비지너리의 삶을 살아온 그의 진가는 도미니카에서도 발휘됐다. 하나님은 그의 지난 삶의 경험을 그대로 사용하셨다. 박 선교사는 도미니카 제2의 도시 산티아고에서 만성적자이던 크리스천 학교의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비지너리'의 시각으로 주위를 바라보니 도처에 할 일이 넘쳤다. 도미니카의 인접국 아이티가 보였다. '진흙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티 아이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 박 선교사는 젊은 시절 지녔던 '민족 복음화의 환상'을 다시 생각했다. '그래, 저 아이들이야. 저 불쌍한 아이들을 아이티 민족 복음화의 기수로 삼아야 해.' 아이티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어 그 땅에도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티에서는 적극적으로 학생 사역을 펼쳤다. 도미니카에서 온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CCC 형태의 순을 조직, 전도와 양육을 실시했다. 한 명으로 시작된 순 모임이 지금은 100여명 정도로 늘어났다. 그는 아이티 각 지역에 전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를 추진할 비전센터를 30곳 정도 지을 계획으로 기도 중이다.

지난해 1월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이후에는 구제 사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회성이 아니라 아이티의 기독교 인프라가 강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한국과 미국, 남미 등을 연계한 구제 사역을 펼치고 있다.

최근 아이티 선교 사역 확대를 위해 방한한 그는 "복음으로 무장된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서 "아이티의 '그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한국교회가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 선교사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젊은이들은 '세상 스펙'보다 '하늘의 스펙'을 쌓아나갈 때, 결국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알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직도 청년의 기상이 보이는 박 선교사는 "어차피 우리 모두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이라면서 "청춘의 시기부터 각자 서 있는 장소에서 '래디컬 크리스천'의 삶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했다.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