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1)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2차 선교여행에 마가 동행여부 놓고 바울-바나바 심하게 다퉈
바울이 비록 당대의 저명한 학자이기는 했어도 교회 안에서는 신참 선교사의 입장이었다. 그가 감히 나사렛 예수의 으뜸가는 제자이며 교회의 수장으로 존경받던 베드로를 면박한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오히려 바울과 그 입장을 변호했던 베드로의 리더십은 과연 교회의 수장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거칠었던 베드로의 성품이 그토록 너그럽게 바뀐 것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그런 자세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후 다시 나타났다.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은 '할례 논쟁'의 경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 1:1∼3)
예루살렘 총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바울은 이제 자신도 '사도'임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다. 그의 거침없는 성품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서신의 수신자를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로 한 것에는 좀 문제가 있다. 그가 갈라디아의 일부 지역에서 선교하기는 했으나 그곳은 또한 베드로 전서의 수신자 명단에도 나와 있듯이 베드로의 선교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당시의 지도를 보면 갈라디아는 남과 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바울은 남부 갈라디아에 속하는 비시디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서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는 본도에 가까운 아마시아, 젤라, 타비움 등 북부 갈라디아에서 전도했다. 바울이 남과 북을 구분하지 않고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선교 지역에 관계 없이 갈라디아의 모든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써서 보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자신이 좋은 문장으로 편지를 쓰기도 어려웠겠지만, 바울의 주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뜻에서 자신의 선교지까지도 포함해서 써 달라고 의뢰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베드로의 당당한 리더십이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할례 문제'로 일어났던 혼란들이 일단 정리되자 이듬해인 AD 50 년 바울은 곧 제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한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행 15:36)
그러나 이 때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행 15:37∼39)
안디옥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꾼인 두 선교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 민망한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은 그가 마가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제1차 선교 여행에서 중도 이탈했던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려 했던 바나바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모든 제자들이 그랬듯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는 종말론적 신앙의 소유자 바나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돌아와 사업에만 열중하는 조카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왜 그와 함께 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일까?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대목을 바울이 마가에 대하여 성실하지 못한 일꾼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중에 쓴 바울의 서한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마가와의 동행을 원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
선교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물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나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또 그들을 돕는 여러 가지의 사역이 필요하고, 그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또 바울은 '사업하는 자'에 대한 격려와 교훈도 잊지 않았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그리고 바울은 마가에게 주는 듯한 말도 남겨 놓았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
마가는 후일 바울의 그 다음 대목을 감명 깊게 읽었을 것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것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강론'이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후일 마가가 교역의 중심지인 고린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이 서한을 읽었다면 그 감격이 어땠을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특히 다음 대목은 학자였던 바울이 마가에게 주는 말 같았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그러므로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과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바나바는 바울의 그런 태도를 섭섭하게 여겼던 것 같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9∼41)
그러나 마가가 안디옥에 사업을 벌여 놓고 있었다면 왜 다시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 구브로로 갔던 것일까? 마가는 제1차 선교 여행에 그들과 동행하면서 특히 바보 즉 파포스 쪽에 지중해 진출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다시 구브로로 갔을 것이다. 외경 '바나바 행전'에는 바나바가 구브로에서 순교했다는 기사가 있고, 아직도 바나바의 기념 교회와 그의 무덤이 구브로에 남아 있으나 마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바나바 행전'의 저자가 마가라고 하기도 하나 그런 증거도 없다. 성경에서 마가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AD 62년 바울이 로마에서 골로새 교회로 보낸 서한에서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 4:10)
AD 50년 성경에서 사라진 마가는 AD 62년까지 12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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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