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한
라틴어 명언 중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어느 기업에서는 광고 문구로
사용하고 있는데,
지난 달 말에 한국에 온
세계적인 석학인
독일의 몰트만 박사는
<숨 쉬는 한 희망하라>는 말로
강의의 결론을 내렸다.
그와 함께 강연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실천신학자 은준관 박사도 어려운 시대에
미래와 희망을
논하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했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머리에 <숨 쉬는 한 희망하라>는
문구를 새겨놓은 듯
쉬 떠나지 않았던 것은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함을 벗어나
참 어려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마음에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갈수록 사회면의 기사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기사로 도배를 하고
있으면서,
이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예능 기사는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왜 자꾸만 이 사회는
꿈은 사라지고
절망의 어두움만 짙게 깔리고 있을까.
이전에는
예술가들이 살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지금은
남자로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말하듯,
특정한 영역까지
시시각각 달라진 환경으로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아니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가 유행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 땅에
가장 살기 좋은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요순시대가
얼마나 있었던가.
만약 있었다면
아마도 그곳은 유토피아일 것이다.
물론 다른 때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시각(視覺)의 차이에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작품도
사물도
문제도 다르게 해석되어진다.
어른이 보는 시각과
아이가 보는 시각,
동양인과 서양인이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다르다.
원자력에 대한
시각도 극과 극이다.
이렇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문제라는 것이
결국 시각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은 문제를 보고서도
누구는 불가능을 말하고
어떤 이는 그 곳에서
역발상적인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렇다.
생각지 않았던 어떤 큰 문제가
당사자에겐
종말(終末)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
앞으로 다가올 종말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도 요즘 나오는
영화들은
지구 패망 위기를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종말은 이제
최상급 자극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은 소재가 되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대안은
종말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겨날 수 없기에
종말이 단골 메뉴가 되리라 생각되어진다.
‘사물이
보이는 거 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자동차 백미러의
문구처럼
종말은 단순한 영화소재가 아니라,
실제로
생각보다 너무나 가까이 와 있는
가장 현실적인
주제임을 인식해야한다.
이런 저런 연유로
이미
사람들은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
기후로 인한 여러 재난과
방사능재해
그리고
천재지변을 통해
현대인은 종말에 대해 충분히
익숙해진 것은
점점 세상은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에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종말은 희망의
또 다른 출구이지
종말이라고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염세주의적 인생일 뿐
진정한 종말의 의미와는 다른 문제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종말>도 제목과 다르게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홀로 살아남아 자연에 적응하고
맞서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생존 본능과
고독 밖에 남지 않았던 그녀가
어떻게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라스트 폴리스맨>에서도
지구 종말에
대처하는 각기 다른 모습의
광기와 함께,
그 안에서
묵묵히 자신을 제어하며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한 사람은
우리에게
우울하지만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기에
인기가 함께
현대인들의 잠언이 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Eschatology)은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을 다룬다.
문제는 예수가 재림할 때
누구에게는
가장 큰 소망의 날이 되지만
누구에게는
가장 절망의 날이
되기에
종말에 대한
의미는
이토록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이론이다.
진정
종말이 종말이
되지 않기 위해선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소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막연한 파랑새를
잡는 것이 아니라 종말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는
분명한 무언가를 있다면
그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 그 날
보험이 날 지킬 수 있을까.
몰트만 박사는
마지막 때에 바이블에서 일관되게
외치는 한 가지는
‘깨어서 기도하라!
기도해서 깨어라!’라고 주장했다.
종교를 떠나서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허무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죄인이기에
종말을 앞두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기도라는
당면과제 앞에 각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두려움과 평안이 올 것이다.
대부분 기다림이란
막연한 불안으로만 생각한다.
허나
기도하면
꿈이 생겨나고
내일이 기다려진다.
내일이 있기에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 기다릴 힘이 생겨난다.
그래서
기다림은 고통이 아닌
희망이 된다.
꿈을 갖고
기다리면 반드시
내일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 키케로는
<나는 숨 쉬는 한 희망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희망의
다른 이름은 바로 기다림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는 기다리라.
고도가 오지 않을 때
기다리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조차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은 오직
기도와
기다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과 기도뿐
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이제는 알 것 같다.
영광스러운 것들 중
대부분은
오랜 기다림을 통해 얻었듯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책은
결국 기도와 기다림이었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이기에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한다.
주여,
사방이 막혀도
온 세상이 깜깜해도
살아 숨 쉬는 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소서.
인간은
연약하고
허무하고
고독하고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기에,
썩을 소망,
무너질 소망,
사라질 소망에 속지 말고
다윗처럼
주께만 소망을 두게 하소서!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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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허락작가ꁾ이요셉님, 우기자님, kammy님, 포남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