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랜드

교회는 눈물을 통해 굳건해진다

포항부동산정보공인중개사사무소 2012. 2. 3. 10:58

어리석은 질문을 해본다. 일천하고도 몇 백 년 전에 이집트 사막에 살던 영성가들이 만일 우리나라 땅을 밟는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사막에 살아보기는커녕 사막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고, 겨우 해수욕장 모래사장을 밟아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것이 주제넘는 짓일 게다.

사막의 영성가들이 이 땅에 온다면

하지만 시공을 초월한 그분들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에, 책장을 넘기며 얻은 알량한 지식일지라도 무익하지는 않을 터이다. 아마도 영성의 대가들이 오늘날 이 땅에 다시 온다면, 우리를 향해 눈물이 말라간다고 책망하며 애통해하리라.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마 5:4). 혹 눈물이 말라가는 자리를 분노와 냉소가 메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으며 어찌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것인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이 땅의 교회는 눈물을 통해 그 기초가 견고해졌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눈물이 폭포수를 이루던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덕목으로 숭상하던 유교는 눈물 흘리는 것을 덕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기독교인의 삶은 자신에 대해 애통해 하는 눈물을 흘림으로써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는 나라 잃은 설움을 눈물로 승화했고, 7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에는 가난의 고통을 눈물로 씻고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에서조차 눈물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을 만나보기 힘든 삭막한 시대가 되었다.

다른 사람을 놓고 슬퍼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나 자신을 놓고 눈물 흘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진실어린 눈물을 흘리는 자라야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 슬퍼할 수 있는 까닭이다. 사막 구도자인 압바 포이멘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먼저 자신에 대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다. 자기 자신을 놓고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스스로를 위한 영적인 희생제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포이멘은 또 어떤 수도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는 복된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대 자신을 놓고 울었으니 말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성경 중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를 염두에 둔 말이다. 공자는 "다 글렀구나, 나는 아직 자기의 허물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반성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지만(논어 5:26), 공자가 이집트의 사막에 갔더라면 달리 말했을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다 같이 목 놓아 울며 카타르시스와 공동체적 유대감을 경험했지만, 그 눈물은 제의적인 것이었지 사막 기독교인의 눈물처럼 내면에서 솟아난 자기반성의 눈물은 아니었다.

압바 모세라는 자는 "사람은 눈물로써 덕을 얻게 되고, 눈물로써 죄 사함을 얻게 된다"고 했다. 자신을 놓고 슬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印) 쳐 주신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다시금 눈물이 필요한 이유다. 공정한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지만, 공정한 경쟁에서 누군가를 누르고 승리했다고 해서 의롭게 되지는 않는다. 하물며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 말씀에 자신을 비추며 스스로에 대해 눈물을 흘릴 때에라야 의로움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고 했다. 그대 자신을 아는 것보다 그대 자신에 대해 눈물 흘리는 것이 자신을 더 의롭게 만든다. 지식의 완성은 눈물이라는 것, 이는 사막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일 게다.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